배추보다 먼저 절여지는 마음 — 김장을 앞둔 며느리의 일상
정선이 소장 · 2026. 11. 1. · 조회 4

11월이 되면 가족 단체 대화방에 "올해 김장은 ○일에 한다"는 공지가 올라옵니다. 그 한 줄을 보는 순간 달력을 넘기고, 연차를 낼지, 아이는 누구에게 맡길지부터 헤아리게 됩니다. 김장 날짜가 정해지는 순간, 며느리의 김장은 이미 시작됩니다.
김장은 한 해 먹을 김치를 함께 담그며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정겨운 풍경으로 이야기됩니다. 그러나 상담실에서 듣는 김장 이야기는 조금 다릅니다. "몸이 힘든 건 괜찮아요. 그날 들은 말이 오래 남아요."
배추보다 먼저 절여지는 마음
이른 아침부터 배추를 나르고, 절이고, 씻고, 양념을 버무립니다. 그 사이사이 식사를 차리고 치웁니다.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데, 일이 끝나면 다들 거실에 앉아 쉬고 며느리는 여전히 설거지통 앞에 서 있습니다.
몸의 피로보다 마음을 더 지치게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일들입니다. 어른의 표정을 살피고, 동서들 사이에서 말을 고르고, "올해는 간이 좀 싱겁네" 한마디에 하루 종일 마음이 쓰입니다. 수고했다는 인사보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더 오래 남습니다.
이런 마음이 든다면
- 김장 날짜가 잡힌 뒤로 잠이 얕아지고 속이 편치 않다
- 시댁으로 가는 차 안에서 말수가 줄고 표정이 굳는다
- 그날 들은 말을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되풀이한다
- "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"라는 배우자의 말에 서운함이 화로 바뀐다
- 다녀온 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이유 없이 눈물이 난다
이런 반응은 예민하거나 마음이 좁아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. 편히 쉴 수 없는 자리에서 긴장한 채 오래 일했다는 몸과 마음의 기록입니다.
왜 김장날은 유독 서운할까요
김장은 일의 양만큼이나 인정이 오가는 자리입니다. 누가 얼마나 일했는지, 누구의 손맛이 기준인지, 누가 김치를 얼마나 가져가는지가 말없이 오갑니다. 애써 일했는데 당연하게 여겨질 때, 며느리는 "나는 이 집에서 어떤 사람인가"를 다시 묻게 됩니다.
배우자의 자리도 큽니다. 갈등이 생겼을 때 "우리 엄마가 원래 그래" 하고 한발 물러서는 배우자를 보면, 어른의 말보다 그 순간의 외로움이 더 깊이 남습니다. 김장이 끝난 뒤 부부 사이가 서먹해지는 일이 잦은 이유이기도 합니다.
어른에게도 사정은 있습니다. 해마다 김장을 책임져 온 어른에게 이날은 "아직 내가 이 집을 지키고 있다"는 것을 확인하는 날일 수 있습니다. 사정을 안다고 서운함이 사라지지는 않지만, 그 말이 나를 깎아내리려는 뜻만은 아닐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두면 마음이 조금 덜 다칩니다.
올해 김장을 조금 덜 힘들게
첫째, 김장 전에 부부가 먼저 이야기합니다. 몇 시에 가서 몇 시에 올지, 배우자가 맡을 일이 무엇인지 미리 정해 두면 그날의 서운함이 훨씬 줄어듭니다. "도와줘"보다 "배추 나르기와 뒷정리는 당신이 맡아 줘"처럼 구체적으로 부탁하는 편이 좋습니다.
둘째,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을 정합니다.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려 하기보다 몸이 버틸 수 있는 선을 알고, 그 선에 닿으면 잠시 쉬어도 괜찮습니다.
셋째, 마음에 걸린 말을 혼자 되씹지 않습니다. 믿을 만한 사람에게 꺼내 놓거나 종이에 적어 보세요. 속으로만 굴릴수록 말은 더 커집니다.
넷째, 다녀온 뒤의 나를 챙깁니다. 김장 다음 날은 일정을 비우고, 수고한 나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해 주세요.
김장 김치는 시간이 지나야 맛이 듭니다. 관계도 그렇습니다. 한 번에 바뀌지 않아도, 내 마음을 먼저 알아주는 일부터 시작하면 조금씩 달라집니다.
올해 김장날은 잘 해내는 며느리가 되는 날이기보다, 수고한 자신을 알아봐 주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.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하시면 공감터가 곁에 있겠습니다.
― 공감터 상담심리연구소 정선이 소장
